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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2를 읽고

“미움 받을 용기2”를 고른 이유

[미움받을 용기 1]을 읽고나서 느낀 여운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뒷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미움받을 용기2]는 아들러의 심리학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들러 심리학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답합니다.

인상 깊은 내용

나쁜 그 사람, 불쌍한 나라는 핑계

철학(philosophy)의 어원인 필로소피아(philosophia)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인 셈이죠.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자”를 자처하는 소피스트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내 지식이 완전하지 않음”을 알게된 “무지의 지”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추구하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자아를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존경(respect)의 어원인 레스피치오(respicio)는 “본다”라는 의미입니다. 존경은 먼저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눈 앞의 타인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누군가로 부터 인간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는다면 그 사람은 큰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즉, 존경은 “용기 부여”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당신의 “지금”이 과거를 결정한다는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지금의 나”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나”라는 역사책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부분은 불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말은 역사를 전공한 저에게 사실이 아닌 내용도 역사책에 기록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충격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인간세상의 현실이기 때문에 받아 들이기로 했습니다. 다만 힘들더라도 사실인 내용을 남기려는 사회 구성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부터 그러한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왜 상과 벌을 부정하는가

청년은 자신이 문제를 겪고 있는 학교 현장을 대화의 주제로 가져왔습니다. 철학자는 아이들에게 야단을 치지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야단을 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아이들이 잘못이 잘못인지 모를 가능성이 있다. 2)아들러의 “문제행동의 5단계”의 입각해 문제 행동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

아이들은 야단 맞을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비합리적인 일을 합니다. 따라서 아들러는 문제 행동을 하는 것에는 숨은 목적이 있다고 유추를 했습니다. 아들러는 인간의 문제 행동을 다음 5단계로 설명했습니다.

  1. 칭찬 요구(ex. 컨닝 또는 부정행위를 하는 아이)
  2. 주목 끌기(ex. 수업 중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아이)
  3. 권력 투쟁(ex. 도발하고 싸움을 거는 아이)
  4. 복수(ex. 특정 행동으로 혐오감을 주는 아이)
  5. 무능의 증명(ex. 모든 과제를 거부하는 아이)

문제 행동을 “소속감”, 즉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목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문제 행동은 대게 [권력 투쟁] 단계에서 그칩니다. 교육자는 거기서 더 심해지지 않도록 아이들을 이끈다는 점에서 그 역할이 큽니다. 그래서 되도록 이른 단계에서 문제 행동의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단지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 결정을 지지하고 도와주면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려주되, 너무 가깝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거리에서 지켜보면 됩니다. 비록 그 결정이 실패로 끝난다 할지라도 아이들은 “내 인생은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경쟁원리가 아닌 협력원리에 기초하라

행복한 삶을 위해 “남과 다른 것”에 가치를 두지 말고 “나는 나”라는 것에 가치를 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는 나”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타인과 비교하고 그 “차이”에만 주목하려는 것은 타인을 속이고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삶의 방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모든 말과 행동을 인간관계 속에서 생각합니다. 즉, 모든 말과 행동에는 그것을 향하는 “상대”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보이는 얼굴, 교사에게 보이는 얼굴, 친구에게 보이는 얼굴, 선배와 후배에게 보이는 얼굴이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반에서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학생의 문제행동은 교사를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사와 학생의 문제이며 선생님은 그것을 받아 들여야합니다.

“자립”이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인 반면, “의존”은 자신의 가치를 타인이 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답은 “자립”에 있습니다. 나의 행동에 대한 “진실”을 자각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주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모든 고민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면 타인과 관계를 끊으면 고민이 해결이 될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기쁨 또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는 “모든 기쁨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라는 정의가 숨어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뭐든지 무작정 받아들이는 의미가 아닙니다. 타인이 하는 말에 대한 한번쯤 의심해보는 것,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보는 것, 여기까지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런 다음에 설령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까지 포함해서 그 사람을 그 자체로 믿는 것입니다. 타인을 믿는다는 것은 뭔가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인 작용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웃을 그냥 사랑하지 말고, 나를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타인을 믿을 수 없다”고 호소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믿는다고 해도, 그 누군가가 자신을 믿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타인의 과제”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생각 전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써 타인을 믿는 것. 그것이 신뢰입니다.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존경하는 것은 “주는” 행위입니다. 마음을 넉넉히 가지고 그 모아놓은 것을 타인에게 줄 필요가 있습니다. 타인이 존경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기가 먼저 존경하고 신뢰해야하는 것입니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사랑하는 인생을 선택하라

아들러는 타인에게 사랑받는 기술(수동적)이 아닌 타인을 사랑하는 기술(능동적)에 집중했습니다. 타인에게 사랑 받는 것보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몇 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혼자서 달성하는 과제(ex. 공부하는 것)”와 “무리를 지어 달성하는 과제(ex. 일하는 것)”를 가정과 학교에서 배웁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습니다. 아들러는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를 “사랑”이라 정의했습니다.

두 사람이 달성하려는 것은 “행복”입니다.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록되고, 인간의 행복 또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아들러는 “행복”을 “공헌감”으로 정의했습니다. 공헌감은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공헌감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느꼈다면 더 이상 근거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우선 “나”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이 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요? 사랑을 함으로써 “나”로부터의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러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과거(유아기) 그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는 황금 시대에 살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여전히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충분히 오래 울고, 충분히 항의하고, 협력을 거부하면 다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고, 그들은 인생과 사회를 전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만 초점을 둔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이들은 신체적 열등성을 고려해야합니다. 아이들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성격이 제멋대로라서 우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세계의 중심”으로 군림합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세계의 중심”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세계와 화해하고 자신이 세계의 일부임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서 “자립”의 의미가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자립”은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입니다.

인간은 변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나”였던 인생의 주어를 “우리”로 바꾸어줍니다.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나”로부터 해방되어 자립을 이루고,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알고 나서 인생의 주어가 “우리”로 변하는 것, 이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입니다. 단 두 사람으로 시작된 “우리”는 머지않아 공동체 전체로 그리고 인류 전체로까지 그 범위가 확대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공동체 감각”입니다.

아들러는 연애든 인생 전반이든 “운명의 상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운명의 상대”를 찾는 것일까요? “만남”을 특별한 “관계”로 발전시키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관계”를 맺을 용기가 없는 사람은 “운명의 사람”이라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우리에게 운명의 사람은 없거니와 그런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기다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하다보면 “운명적인 무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운명은 사전에 정해진 것도,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닌 두 사람이 쌓아 올린 것입니다. 즉, 운명이랑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 나서

[미움받을 용기 1]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아들러의 “목적론”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인생의 과제”로 “일”, “교우”, “사랑”의 인간관계를 소개했으며, 결론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자립”하고 사회적으로는 “조화”를 이루라는 배움을 얻었습니다. [미움받을 용기 2]에서는 사랑에 대한 아들러의 관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사랑”을 통해 인생의 주어를 “나”에서 “우리”로 변화시켜야 함을 시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별을 하면 후회가 없나요?”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지금 여기”에 충실해야함을 느꼈습니다. 아들러의 심리학을 한번 알게 되면 이미 그 이전으로 돌아가긴 어렵다는 말에 공감이 되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관계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이별”을 맞이했을때 웃을 수 있도록 말이죠. 문득 주변 사람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회사 내에서 독서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독서모임을 준비하기위해 책을 읽고, 책에 대한 내용과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각자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에 대한 이야기를 오랜만에 했던 것 같습니다. 모쪼록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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